
솔직히 처음엔 고창이라는 동네를 잘 몰랐다. 그냥 어디서 들어본 복분자나 장어 유명한 시골 동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별 기대 없이 처음 찾아갔을 때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산도 있고, 탁 트인 바다도 있고, 수백 년 된 깊은 절에 끝없이 펼쳐진 갯벌까지 다 품고 있는 곳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아이 둘을 키우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들락거리다 보니, 어느새 나한테 고창은 제2의 고향처럼 정겹고 익숙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우리 집 식구들이 수년에 걸쳐 쌓아온 이 소소한 추억들이 자그마한 힌트가 되면 좋겠다.
업고 걷던 아이가 자라는 동안
고창에서 내가 제일 자주 간 곳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선운사다. 아이들 아주 어릴 때부터 머리가 뚱해져서 제 고집을 부리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갔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처음 갔을 땐 참 막막했다. 떼쓰고 울어대는 어린 아이를 포대기로 둘러업고 절 안을 천천히 걸었다. 아이 몸무게에 눌려 어깨는 가해 오고 몸은 땀범벅이 되어 묵직했는데, 이상하게 절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 신기했던 기분이 잊히질 않아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홀린 듯이 다시 선운사를 찾았다.
선운사는 입구 쪽에 졸졸 흐르는 계곡이 있어서 아이들과 가기에 더없이 좋다. 애들 어릴 땐 거기 돌다리 밑에 앉아서 바짓단 다 적셔가며 물장구치고 놀았고, 좀 머리가 큼 뒤로는 사찰 길 따라 같이 걸으며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한여름에는 계곡에서 튜브를 가지고 놀았던 경험들도 있다. 물이 많았기에 가능한 곳이다.
길 따라 느릿느릿 오르다 보면 정상가까이에 자그마한 찻집이 하나 나온다. 오미자가 많이 나오는 계절이 오면 우리 식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시원한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차를 주문했다.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걷다가 마시던 그 새콤달콤하고 알싸한 오미자차 맛은 지금도 혀 끝에 선하다. 아이들도 빨대를 물고 볼이 빵빵해지도록 마시곤 했다.
거기는 사찰 관련 물건들도 판매를 하다 보니 우리집에는 한동안 우리집에는 사찰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여름의 선운사는 숲이 워낙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서 뜨거운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걸러진다. 울창한 느티나무 그늘 아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겨드랑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며 더위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천왕문을 지나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길목엔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바람에 찰랑거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끝 풍경 소리가 짤랑거리며 들려온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복잡한 생각들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녹아내렸다.
조금 더 걸어 절 뒤편 산길을 오르면 도솔암이 나온다. 오르는 길 중간중간 맑은 냇가가 나오는데, 아이들이랑 신발 벗어 던지고 발을 담그며 깔깔거리던 순간들이 참 오래 남는다. 도솔암 앞에 딱 도착해서 마주치는 거대한 절벽이랑 마애불을 보면, 선운사 본전과는 또 다른 한층 깊고 아늑한 조용함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알면 알수록 다르게 보이는 풍경들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나오는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고창이 딱 그런 동네였다. 그냥 차 타고 스쳐 지나가면 흔한 시골 풍경 같지만, 그 내력을 조금 알고 걸으면 완전히 다른 동네처럼 보인다.
고창읍성 돌성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소나무랑 대나무가 빽빽하게 이어지고 바람 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린다. 이른 아침 성곽길을 걸을 때 마시던 그 맑은 공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냥 걸어도 참 좋은 길이지만, 이 돌벽이 수백 년 시간을 견뎌내며 자리를 지켜온 공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발걸음의 무게부터 달라진다.
세계적으로 보전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운곡 람사르 습지도 빠뜨릴 수 없다. 사람 손을 오랫동안 안 타서 온갖 풀이랑 벌레, 새들이 제 세상인 듯 사는데, 나무 데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 자연이 진짜 살아서 숨 쉬고 있구나' 하는 게 온몸으로 느껴진다. 화려하게 꾸며진 관광지는 아니지만, 조용히 가만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게 꽉 차는 곳이다.
(2탄: 구시포 노을캠핑장에서 아이들과 보낸 바다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