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우리 가족의 여행은 늘 바빴다. 지도 앱을 켜두고 ‘여기 들렀다 다음은 어디 가지?’ 하며 시간을 쪼개 쓰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 진도 여행은 마음가짐부터가 다랐다. 나도, 남편도, 아이들도 일상의 톱니바퀴에 조금은 지쳐 있던 때였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욕심을 싹 비워내기로 했다.
“이번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한 곳에서 진득하게 쉬어보자.”
그렇게 선택한 집결지가 바로 쏠비치 진도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선택은 기대 그 이상이었다. 리조트 담장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아도, 그 공간 안에 머무는 것 자체로 이미 완벽한 여행이 되어주었으니까.
먼 길 끝에 만난 낯설고 반가운 풍경
처음 쏠비치 진도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 멀고 한적한 진도 땅 끝에 도대체 왜 이런 대형 리조트가 들어선 걸까?’
하지만 차를 몰아 긴 이동 끝에 진도에 들어서고, 바다를 품은 리조트의 전경을 마주한 순간 그 의문은 단번에 녹아내렸다. 이곳은 그냥 거대한 숙소가 아니었다. 진도의 푸른 남해 바다와 완만한 산 능선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품어 안은, 마치 지중해의 작은 해안 마을 같은 공간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책로와 나지막한 건물들, 정성스레 가꿔진 정원과 바다가 단절 없이 하나로 흐르고 있었다. 그 길을 아이들 손을 잡고 걷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론 바다를 바라보며 묘한 감정이 스치기도 했다. 진도라는 이름은 우리 모두에게 세월호라는 깊고 아픈 기억이 함께 새겨진 공간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 커다란 아픔을 보듬고, 지역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많은 이들이 마음을 모았던 그 흐름 속에서 이 공간도 태어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단순히 ‘화려하고 잘 꾸며놓은 숙소’를 넘어, 상처 입었던 땅에 사람들의 발길과 웃음소리를 다시 모으는 따뜻한 온기처럼 다가왔다.
힘들게 뚫었던 예약,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여서 고마웠던 순간
내가 찾아갔던 때는 쏠비치가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기였다. 워낙 입소문이 뜨거웠던 터라 원하는 날짜에 방을 잡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몇 번이나 예약창을 새로고침한 끝에 겨우 날짜를 맞출 수 있었다.
도착해서 체크인 로비에 들어섰을 때도 몰려든 사람들로 대기 시간이 제법 길었다. 보통 같으면 지칠 법도 한데, 창밖으로 펼쳐진 파란 바다를 보고 있으니 지루함보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방에 짐을 풀고 베란다로 나갔을 때 그 상쾌한 바닷바람이라니! 그 고생을 하며 예약을 뚫고 찾아온 보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 오길 davvero 잘했다.’
그때 아이들이 딱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다. 지금 돌아봐도 이 나이 때 가길 참 잘했다 싶다. 너무 어릴 때처럼 징징대거나 유모차를 끌어야 하는 고단함도 없었고, 그렇다고 머리가 너무 커서 엄마 아빠 따라다니는 걸 귀찮아할 나이도 아니었으니까. 리조트의 구석구석을 자기들만의 놀이터처럼 즐기기에 더없이 딱 좋은 시절이었다.
수영장에서 물장구치고, 잘 정돈된 정원을 뛰놀며 사진을 찍고, 베이커리 카페에 앉아 고소한 빵 냄새를 맡으며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기프트샵 구경도 아이들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큰맘 먹고 사줬던 오르골이 하나 있다. 방 책장 한구석에 가만히 놓여 있는 그 오르골 태엽을 오랜만에 돌려보면, 내가 좋아하는 히사이시 조의 맑은 멜로디가 쪼르르 흘러나온다.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날의 진도 바다 향기와 아이들의 해맑던 웃음소리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번져나간다.
바닷바람 속의 산책, 그리고 조금 추워도 행복했던 물놀이
쏠비치 진도의 진짜 가치는 정교하게 설계된 산책길에 있다. 바다 선율을 따라 만들어진 정원 길은 아무런 목적지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걸을 때 가장 빛이 났다. 이른 아침 세수만 대충 하고 나와 마시던 알싸한 새벽 바다 공기, 노을이 붉게 물들 때 남편과 아이들 뒷모습을 보며 걷던 저녁길. “아, 이게 진짜 휴식이지. 이게 여행이지.” 하는 혼잣말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역시 아이들에게 가장 또렷한 기억으로 남은 건 인피니티 풀에서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해가 어둑어둑 질 때까지 물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밤이 가까워질수록 바닷바람이 서늘해지면서 물 밖으로 나오면 몸이 오돌오돌 떨리기도 했다. 솔직히 나중엔 좀 춥기도 했다! 하지만 수평선과 수영장 물빛이 하나로 겹쳐지는 그 몽환적인 풍경 속에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도 추위 따위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수평선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웃는 모습을 찰칵 찍어 남겼는데, 그 사진은 아직도 내 휴대폰 배경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날 물속에서 느꼈던 차가우면서도 온화했던 분위기가 가슴으로 전해진다.
저녁에는 리조트 안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낮에는 고소한 빵과 커피를 팔지만, 밤이 되면 은은한 조명 아래 와인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근사한 공간으로 변했다. 신나게 놀아 피곤했던 아이들은 달콤한 빵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남편과 나는 와인 잔을 가볍게 채우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좀처럼 내기 힘들었던,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깊은 속이야기를 나누는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차분하게 하루를 닫는 그 느낌이 참 따스해서, 다음 날 아침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카페를 다시 찾아 가볍게 조식을 즐겼다.
이번 쏠비치에서의 시간은 차를 타고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그저 한곳에서 걷고, 쉬고, 물놀이하고, 소소하게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족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소중한 휴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