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도 처음에는 그냥 가면 되겠지 싶었습니다. 새해 일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정동진이고, 한 해 최대 200만 명이 찾았다는 명소라니 별다른 준비 없이 길을 나섰던 기억이 납니다. 막상 도착하고 나서야 이게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새벽 두 시에 버스를 탄다는 것
저는 매년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러 갑니다.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고, 한 해를 그냥 시작하기가 아쉬워서 생긴 습관입니다. 그러다 한번은 정동진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지로 유명해진 이후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거든요.
새벽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정동진 후기를 검색해봤더니 맛없는 식당에 바가지 요금, 교통 불편, 볼 것도 없다는 말들이 쭉 나오더라고요. 이미 버스는 출발했고, 창밖은 캄캄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상황이 더 실감났습니다. 정동진역 근처에 투어버스들이 2중, 3중, 4중으로 주차를 해놓은 상태였고, 버스에서 내린 다음 인도도 제대로 없는 어두운 차도를 1.2km 가까이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해변 입구까지 15분 정도를 걸으면서 이미 체력이 소모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일출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 남아 있었고, 기온은 영하 10도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 문 연 카페에서 몸을 녹이며 대기한다
- 식당을 찾아 이른 아침 식사를 한다
- 해변이나 공원에서 그냥 버티며 일출을 기다린다
저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대게 칼국수 한 그릇이 1만 원이었는데, 관광지 물가임을 감안하면 크게 억울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숙박비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가장 저렴한 방이 15만 원, 평균이 25만 원, 특정 리조트는 50만 원에서 60만 원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성수기 요금 책정, 즉 동적 가격제(dynamic pricing)가 극단적으로 적용된 경우인데, 동적 가격제란 수요가 집중되는 특정 시기에 공급자가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연간 수요가 새해 전후로 몰리는 구조에서 이런 방식이 반복되다 보니 바가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가 뜨는 방향이 생각과 달랐습니다
7시 15분쯤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해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갔을 때도 비슷한 풍경이었습니다. 강원도는 여름에도 새벽 바람이 차가워서 얇은 겉옷만 걸치고 나온 걸 꽤 후회했던 기억이 납니다. 해안가 체감온도는 내륙보다 훨씬 낮게 느껴지는데, 이를 풍속냉각지수(wind chill index)라고 합니다. 풍속냉각지수란 바람의 속도가 피부에서 열을 빼앗는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것으로, 기온이 같아도 바람이 강할수록 체감온도는 훨씬 낮게 떨어집니다. 정동진처럼 해풍이 직접 닿는 지형에서는 이 차이가 특히 크게 느껴집니다.
추위를 버티며 일출 시각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여기서 일출을 봐야 하나"라는 생각과 계속 싸웠습니다. 어디서나 해는 뜨는데, 굳이 잠도 못 자고 새벽 버스를 타고 차가운 해변에 서 있는 이유가 뭔가 싶었습니다.
막상 7시 40분이 되어 해가 오르기 시작했을 때, 수평선 너머로 장엄하게 솟아오르는 그림을 기대했는데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해가 뜨는 방향도 생각보다 훨씬 오른쪽이었습니다. 게다가 방파제 위에 세워진 배 모양 건물, 썬크루즈 리조트의 부속 시설이 시야 한쪽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건물 내부에서는 5,000원짜리 이용권을 끊어야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용권으로 나중에 음료 한 잔을 교환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수평선이 가장 잘 보이는 명당 시야가 사실상 유료화된 셈이었습니다. 더 찾아보니, 방파제는 어항법상 국가 또는 지자체 관할의 공공 어항시설로 원칙적으로 민간 건축이 불가한 구역입니다. 여기서 어항법이란 항만 및 어항의 지정·개발·관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법률로, 공공 어항시설에는 사적 건축물을 설치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건축 당시 주민 반대와 감사 기록이 있음에도 이후 별다른 행정처분 없이 10년 넘게 영업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국토교통부가 공개한 공유수면 관련 자료에 따르면 방파제를 포함한 공유수면은 공공 목적 외 사용에 엄격한 제한이 적용됩니다(출처: 국토교통부).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이런 시설이 관광 인프라라는 이름 아래 존치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해돋이를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올라오고 나서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토록 하기 싫었던 마음이 싹 사라졌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도 새해 일출을 봐왔지만, 정동진에서 본 그날의 해돋이는 뭔가 달랐습니다. 일부러 먼 길을 달려와서 추위를 버티고 기다렸다는 사실 자체가 그 해돋이를 다르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일출 관광지의 방문 만족도 조사에서도 단순한 경관보다 '경험의 희소성'이 만족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나온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관광공사). 쉽게 말해 힘들게 얻은 경험일수록 기억에 오래 남고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저도 그 말이 맞다는 걸 정동진에서 직접 겪어봤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닙니다. 해돋이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해변은 언제 그렇게 붐볐냐는 듯 조용했고, 가게들 외관은 30년 전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습니다. 정동진이 '시간'을 테마로 해왔다는 건 알겠는데, 시간이 멈춰 있는 게 테마인지, 아니면 그냥 시간이 멈춰버린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정동진이 다시 살아나려면 단순히 새해 인파에 기대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연중 콘텐츠 다양화, 합리적인 숙박 요금 체계, 그리고 공공 시야를 독점하는 구조에 대한 재검토가 함께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강원도 여행에는 정동진에 다시 한번 가볼 생각입니다. 이번엔 새해가 아닌 조용한 계절에, 사람이 빠진 해변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때 못다 한 소원 하나 빌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