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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당일치기 (황리단길, 제로웨이스트, 우양미술관)

by 카타리 2026. 6. 4.

황리단길

경주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면 오히려 더 만족스럽다는 말, 처음 들으면 의아합니다. 짧은 시간에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 싶은데, 제가 직접 다녀와 보니 그 역설이 맞았습니다. 욕심을 줄이면 경주는 다르게 보입니다. 황리단길 맛집과 제로웨이스트 숍, 우양미술관까지 엮은 하루 코스를 저만의 시선으로 풀어봤습니다.

황리단길에서 발견한 경주의 새 얼굴, 제로웨이스트 문화

경주 하면 첨성대와 대릉원이 먼저 떠오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황리단길 골목 안쪽에는 전혀 다른 경주가 있습니다. 제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들른 곳은 황리단길 근처의 제로웨이스트 숍 '밭매기'였습니다. 제로웨이스트(zero-waste)란 생활에서 발생하는 폐기물 자체를 최소화하는 소비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물건을 덜 사고, 쓰레기가 덜 나오는 방식으로 살자는 운동입니다.

가게 안에는 대나무 칫솔, 천연 수세미, 리필 세제, 종려나무 비 같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리필 스테이션이란 세제나 샴푸 같은 생활용품을 집에서 가져온 용기에 직접 채워가는 시스템으로,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재 소비를 줄이는 방식입니다. 제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여행지에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했거든요.

환경부에 따르면 국내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사용량은 약 88kg으로 세계 최고 수준 중 하나에 속합니다(출처: 환경부). 이 수치를 알고 나면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고를 때도 손이 조심스러워집니다. 저도 압축 수세미 하나를 들고 한참 고민했습니다. "귀여우니까 사자"가 아니라 "집에서 정말 쓸 수 있을까"를 먼저 따지게 된 건 나이가 들면서 생긴 습관인 것 같습니다.

황리단길 자체는 이미 많이 알려진 곳이라 주말에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감각적인 카페와 소품숍이 많지만 비슷한 분위기가 반복된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조용한 경주를 기대하고 황리단길로 직행하면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점심은 신라제면에서 칼낙지와 감자전, 바지락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칼낙지는 짧은 소면에 낙지와 매운 양념을 섞은 경주식 면 요리로, 첫향부터 꽤 강한 매운맛이 올라옵니다. 칼낙지의 매운 정도는 스코빌 지수(SHU)로 환산하면 중간 이상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스코빌 지수란 고추의 캡사이신 농도를 수치로 나타낸 척도입니다. 매운맛에 예민한 분이라면 밥에 비벼 먹는 방법이 훨씬 낫습니다. 제가 직접 먹어보니 밥과 함께 비비면 맵기가 제법 중화됐습니다. 감자전은 가격 대비 실망할 일이 거의 없는 메뉴입니다. 얇게 썬 감자 슬라이스가 서로 붙어 구워진 형태로, 바삭한 겉과 촉촉한 속이 꽤 잘 어울렸습니다.

경주 당일치기 코스를 고를 때 참고할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황리단길 인근 제로웨이스트 숍 밭매기 (공유 책장과 리필 스테이션 운영)
  • 신라제면 칼낙지 및 감자전 (매운맛 있음, 밥과 함께 비벼 먹기 권장)
  • 황리단길 100년 된 건물 카페 (오래된 공간의 분위기가 살아 있음)
  • 우양미술관 보문 일대 (황리단길과 분위기 전혀 다름, 이동 시간 고려 필요)

우양미술관에서 백남준과 아모아코 보아포를 마주한 오후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오후에는 경주 보문 쪽에 있는 우양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우양미술관은 1991년에 설립된 사립미술관으로, 국내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백남준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제 경험상 경주 여행 코스에 미술관을 넣는다는 건 조금 느린 선택인데, 그게 오히려 잘 맞았습니다.

전시는 백남준 특별전과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 전시, 두 가지가 같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백남준 작가의 대표적인 개념은 비디오 아트(video art)입니다. 비디오 아트란 영상 매체를 회화나 조각과 동등한 예술 언어로 사용하는 장르로, 1960년대 백남준이 개척한 이후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 중 하나가 됐습니다. 학예사 설명을 들으며 '고대기마인상' 앞에 서 있으니 수십 년 전 작품인데도 낯설고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말이 이럴 때 실감납니다.

아모아코 보아포는 가나 출신의 현대미술 작가로, 손가락으로 직접 물감을 찍어 인물을 그리는 핸드프린팅(hand printing)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핸드프린팅 기법이란 붓 대신 손가락을 도구로 삼아 질감과 색을 화면에 직접 쌓는 방식으로, 피부의 따뜻한 온도가 그림에 고스란히 남는다고 표현하는 평론가들이 많습니다. 제가 직접 작품 앞에 서보니 눈의 점막 부분에 선홍색 점들이 탕탕 박혀 있는 디테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설명을 먼저 읽고 보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국내에서 보아포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습니다. 국제갤러리 자료에 따르면 보아포는 2020년 이후 뉴욕, 런던, 도쿄 등 주요 미술 시장에서 빠르게 주목받고 있는 작가입니다(출처: 국제갤러리). 경주에서 이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솔직히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예상 밖의 수확이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당일치기 일정에 미술관을 넣으면 시간이 빠듯해진다는 겁니다. 미술관은 천천히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인데, 기차 시간이 머릿속에 있으면 자꾸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제 경험상 우양미술관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경주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여유 있게 찾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경주 당일치기는 체력 소모도 생각보다 큽니다. 기차로 이동하면 운전 피로는 없지만 황리단길에서 보문까지 이동하다 보면 걷는 거리가 꽤 됩니다. 가방은 가볍게 챙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이번에 작은 사이즈 백 하나만 들고 갔는데 그게 정답이었습니다.

결국 이번 경주 당일치기는 "많이 보자"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곳 몇 군데를 제대로 보자"는 원칙이 잘 맞아떨어진 하루였습니다. 감자전 한 조각, 제로웨이스트 숍에서 집어 든 작은 수세미, 보아포 그림 앞에서 멈춰 섰던 순간. 이런 장면들이 모여 경주를 다시 떠올리게 만듭니다. 다음에는 하루 이틀 묵으면서 저녁의 경주와 이른 아침의 보문을 천천히 걸어보고 싶습니다. 경주는 몇 번을 와도 다르게 보이는 도시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bwzZyKsj8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