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별 기대 없이 따라나선 가평 나들이에서 "이런 정원이 한국에 있었어?"라는 말이 절로 나왔으니까요. 고딩 아들과 중딩 딸을 이끌고 가장 늦은 오후 3시 타임에 들어간 청리움, 관람 마감까지 딱 두 시간 남았다는 말에 우리 가족의 힐링 여행은 그대로 타임어택 서바이벌로 전환되었습니다.
보리산 정상과 비밀 정원, 두 시간에 다 담을 수 있을까
입구 카페에서 회원가입과 차량 등록을 마치고 주차장까지 올라가는 5분 남짓한 드라이브 구간부터 달랐습니다. 차창을 내리자마자 울창한 잣나무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가 차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여기서 피톤치드(phytoncide)란 수목이 해충이나 세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방출하는 천연 휘발성 물질로, 인체의 면역력 강화와 심리적 안정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림청 자료에 따르면 잣나무, 편백나무 등 침엽수림에서 피톤치드 방출량이 특히 높다고 하는데(출처: 산림청), 그 효과를 주차장 올라가는 길목에서부터 피부로 실감한 셈입니다.
문제는 시계였습니다. 청리움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 왕복 40분 거리의 보리산 정상(해발 627m)까지 올라 조망을 감상하는 등산 코스
- 주요 시설과 정원 위주로 여유롭게 관람하는 산책 코스
저는 둘 다 하겠다고 선언했고, 아이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채 깨닫기도 전에 잣나무 숲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야자매트(palm mat)가 깔린 등산로라 발바닥이 편한 건 사실인데, 고도차가 제법 있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여기서 야자매트란 야자나무 껍질 섬유를 압축하여 만든 친환경 보행 매트로, 경사지 등산로에 깔면 미끄럼 방지와 토양 침식 억제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소재입니다. 사람 발길이 드문 깊은 숲인 데다 흐린 날씨까지 더해지니 제법 스산한 분위기였고, 아들이 "엄마, 여기 뱀 조심 표지판 있어. 진짜 야생동물 나오는 거 아냐?"라며 은근히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더군요.
헉헉대며 20분을 올랐을 때, 보리산 정상의 전망 데크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등산객 한 명 없이 산그림자가 겹겹이 쌓인 조망을 우리 가족이 통째로 독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넓은 풍경 앞에서 툴툴대던 사춘기 남매가 일제히 조용해졌습니다. 주차장 고도가 약 450~500m 수준이고 거기서 150m 정도만 더 올라가면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꽤 훌륭한 가성비 등산입니다.
철갑상어는 못 봤지만, 온실 정원 앞에서 온 가족이 멈췄습니다
보리산에서 내려와 정원 구역에 들어선 순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대연못 옆에는 삼족 두꺼비상이 엽전을 깔고 앉아 있었는데, 재운(財運)을 부른다는 안내 문구에 남편 손을 억지로 끌어다 두꺼비를 문지르게 했습니다. 제가 살아생전에 이런 정원 딸린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더니, 남편은 두꺼비를 빤히 쳐다보다가 "여보, 내가 돈 버는 것보다 자기가 로또 맞는 게 빠를 것 같아"라고 했습니다. 그 짠내 나는 현실 발언에 중딩 딸이 "아빠, 내가 나중에 이런 집 선물해 줄게. 대신 내 지분 50%"라며 선언하고, 우리 네 가족은 연못가에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청리움 정원의 공간 구성은 생태조경(ecological landscaping) 개념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생태조경이란 단순히 식물을 심어 꾸미는 것이 아니라, 지형과 수계, 기후 조건을 고려하여 자연 생태계와 인공 조경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설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꽁띠 포도밭은 포도나무 사이사이에 라벤더와 허브, 장미 등 계절 초화류를 섞어 심어 수확철이 아니어도 볼거리가 풍부했고, 설악 녹차밭은 유기농으로 조성된 차밭 두렁을 보리로 마감하는 세심한 연출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순히 테마를 나눈 것이 아니라 각 구역마다 한국 전통 정원의 차경(借景) 기법이 느껴졌습니다. 차경이란 정원 밖의 자연 경관을 담장이나 창틀을 액자 삼아 정원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전통 조경 기법인데, 온실 정원의 통유리창 너머로 인공 바위와 수목이 어우러진 조경이 딱 그 느낌이었습니다.
연못에 철갑상어가 산다는 안내판 앞에서는 아들과 남편이 눈을 불을 켜고 수면을 노려봤지만, 물이 탁해 지느러미 하나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솔직히 아쉬웠습니다. 벽룡담, 대연못 등 거창한 풍수 스토리텔링을 심어놓은 공간들이 수질 관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설화의 신비함이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부 수질 기준에 따르면 생태 연못의 경우 수질 등급 2등급(BOD 3mg/L 이하) 유지를 권장하고 있는데(출처: 환경부), 방문 당일 연못 상태는 그 기준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이끼와 부유물이 가득한 물속에서 신비로운 철갑상어를 기대했던 아이들의 실망한 표정이 아직도 선합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온실정원에서는 모두가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통유리창 안쪽에서 밖을 바라보면, 바위와 나무와 이끼가 하나의 거대한 산수화 액자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온실 안의 열대 식물과 바깥 조경이 유리 한 장을 두고 대비되는 그 장면은, 제가 지금까지 다녀온 어떤 정원에서도 본 적 없는 구성이었습니다.
청리움은 하루 최대 100명, 1회 25명 정원으로 입장 인원을 엄격히 제한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두 시간 내내 정원을 걷는 동안 다른 방문객을 거의 마주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맨날 스마트폰과 학원 사이를 오가는 아이들이 바람 소리를 듣고, 서로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잡아주며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다만 가족 단위로 방문하신다면 딱 한 가지만 기억해 두세요. 오후 3시 마지막 타임은 보리산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순간, 정원을 눈으로 담을 시간이 반으로 줄어 있습니다. 마음의 속도를 늦추러 갔다가 오히려 경보를 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기지 않으려면, 가능한 오전이나 이른 오후 타임으로 예약하시길 강하게 권합니다. 숲길이 은근히 가파르니 아이들 운동화는 필수이고, 보리산 등산로 구간에서는 야생동물 주의 표지판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으니 긴 바지를 챙겨 입는 것도 좋습니다.